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일랜드 왕국 (문단 편집) == 초기 지배와 재정복 == 아일랜드 왕국을 세운 잉글랜드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갈아치우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가톨릭에 대한 종교 탄압을 시도했다. 이에 대항해 1569~1573년, 1579~1583년의 먼스터 반란과 1593~1603년의 9년 전쟁 등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반란이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걸쳐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모두 분쇄, 아일랜드섬 전체를 평정하였다. 이후 잉글랜드는 북부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개신교도들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아일랜드계 토착 세력은 한동안 잉글랜드에 굴복하며 지냈다. 그러던 1641년 잉글랜드가 왕당파와 의회파의 [[영국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자 아일랜드의 토착 세력은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을 결성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자체적으로 정부까지 새우면서 10년 가까이 거의 독립국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의 목을 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끝났고 크롬웰은 10년 내내 거의 독립국처럼 있었던 가톨릭 연맹을 평정하고자 아일랜드에 출병했다. 영국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는 폭동이 발생해 수십만 명의 잉글랜드인들을 살해하고 신교도 교회를 불태웠다. 게다가 찰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미 혼인 관계가 있었던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금은 등을 담보삼아 자금을 빌려 이 자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해 병력 1만명을 요청하고 아일랜드에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제시해 병력 1만명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크롬웰은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했는데 처음엔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전세가 여의치 않자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아일랜드 전역을 초토화하고 살인, 방화, 약탈을 동반해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들은 수십만명에 달했다. 이 당시 가장 잔인했던 사건으로 드로이다(Drogheda)[*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은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로 드로허다 혹은 드로다 정도로 읽는다.] 공성전이 있는데 1649년 가족들이 서로 잡아먹게 될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뒤에 함락이 되자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 이는 개신교를 믿는 소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오히려 가톨릭을 믿는 대다수 아일랜드인들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종주국인 영국을 따라서 개신교로 개종했더니 돌아온 것은 대량학살이었으므로 영국에 대한 실망감도 그만큼 더욱 커졌을 것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 2000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 크롬웰이 자행한 폭력은 아일랜드인들에게 뿌리 깊은 분노를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